2002년 가을에 있었던 일입니다. Driving Concept 라는 드라이빙 스쿨을 수강할 기회가

생겼었지요. 트랙에 나가기 전 참가차량은 모두 정비소에서 검차를 받아야 합니다.

그때 타고있던 77년식 비틀은 참가직전 오일교환, 브레이크액 공기빼기, 뒷브레이크

라이닝 교환을 했습니다. 가장 맘에 걸리던 부분이 타이어였습니다. 산길을 주로 달렸기

때문에 바깥쪽 가장자리가 많이 닳아있는 상태였죠. 타이어를 새것으로 교환하고 트랙에

갈것인가, 아니면 다녀온뒤 바꿀것인가를 고민하다가 결국 다녀와서 교환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Willow Springs Speedway 에 도착하여 이론강습이후 헬멧을 착용하고

트랙에 진입했습니다.



윌로우 스프링스에는 여러개의 트랙이 있는데 한 랩이 1.8마일의 소트랙인 Street of Willow

는 완전히 테크니컬 코스여서 브레이크에 부담이 많이 가는 대신 출력이 떨어지는 차로도

웬만큼 달릴 수 있었던 반면, 2.5마일 길이에 스피드 위주의 메인트랙에서는 출력부족이

그대로 스피드와 연결되는 곳입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그날이 트랙주행 처음인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제차가 가장 느린차는 아니었습니다. 저보다 느리게 달린

드라이버는 (차가 아님) 76년식 포르쉐 911을 몰고있었습니다. 그래도 느린건 느린거여서

트랙에서 최대한 밟으면서도 지루하다고 느껴지는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되더군요.

긴 직선로 끝에 나타나는 1번코너에서도 노브레이크로 진입해야 할만큼 속도가

안붙었습니다. 대체로 요즘의 노멀카로도1번 코너 진입전 브레이킹을 시작하기 전에는

100~120 마일정도는 나오는데 제 차는 80정도밖에 안나왔으니까요.



그런데 첫 세션을 마치고 나서 차를 돌아보다 보니 운전석쪽 뒤타이어의 코드가

드러났더군요. 시계방향으로 도는데다 고속코너들이 많아서 리어엔진인 제 차에서는

가장 부담이 많이 가는 타이어였겠지요. 실밥이 드러나기 시작한 타이어때문에 더 이상

트랙을 타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게다가 차의 성격과 트랙이 전혀 맞지 않았기때문에

달린다 해도 배우는 것보다는 그냥 재미로 유유자적 타는 것이 되었겠지요.



그래서 다음 세션에서는 인스트럭터가 모는 E36 M3에 동승하게 되었습니다.

Driving Concepts라는 스쿨이 BMW클럽과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어서였는지

인스트럭터뿐만 아니라 참가차들의 대부분은 BMW 였습니다. (M6와 Z8도 있었습니다.)

Driving Concepts의 수석 인스트럭터인 칼 맥긴씨는 트랙의 폭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부드럽고 빠른 주행으로 교과서적인 운전을 보여주었습니다. 저엉~말 빠르더군요.



이니셜 D에서 이케다니가 탁미의 차를 타보고 다른 차원인것처럼 느낀것이 아마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다른 것이라면 수준차이가 너무 나서 참고가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 지금까지 제가 해온 운전스타일이 바른 방향을 가지고 연습해왔다는 것은

확인할수 있었지요. 제가 보기엔 한계를 넘어선 영역처럼 느껴졌지만 코너 하나하나에서

정확히 설명을 해주면서 운전을 할수 있다는 것은 그에게 아직도 적지않은 여유가

남아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어쨌든 제가 지금까지 동승해보았던 그 어느

인스트럭터보다도 빨랐고 무척 인상적인 드라이빙 스킬을 조수석에서 유감없이 감상할수

있었지요. 그렇게 빠르게 달리는데 앞에서 비슷한 속도로 달리는 E30 M3가 하나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 차도 장난아니게 빨랐지요.



직선로에서 E30 M3가 추월을 내주었습니다. 인스트럭터가 앞으로 나가서 달리는데 그 후

한랩을 거의 다 돌았을때 백밀러를 힐끔 보니 그 E30 M3가 뒤에서 바짝붙어서 따라오고

있더군요.



그 세션을 마칠때까지 그렇게 빨리달리는 인스트럭터의 뒤를 똥침놓다시피 따라왔습니다.

E36 M3에 비해 토크가 떨어지는 구형모델인 E30 M3로도 그렇게 빨리 달리는 저 차의

드라이버는 누굴까 몹시 궁금했는데 세션이 끝나고 패독으로 들어와 차에서 내리고 나서

한사람이 인스트럭터에게 다가와 처음에 라인을 잡기 힘들었는데 뒤따라가면서 많이

배웠다고 인사를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그친구에게 말을 걸고 보니 한국인이었습니다.

그것이 지금 절친한 사이가 된 정승현과의 첫 만남이었지요.

저는 그의 드라이빙에 크게 감명받은 상태였고 그 또한 첫세션에서 포르쉐를 추월하는

비틀을 보고 '쟤는 누굴까?' 궁금해 했었다고 합니다. 하여튼 그날 오후 내내 그가 트랙에

나가있던 시간 외에는 둘이 자동차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가는줄 몰랐죠.

그의 차에 대한 열정과 지식은 정말 대단한 수준이더군요. 서로가 오랜만에 우리말로

자동차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친구를 사귄것이 그날의 최대수확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샌디에고 인근의 델마에 살고있었기 때문에 팜데일의 윌로우 스프링스

트랙에서는 14번 프리웨이를 타고 내려가다 5번 프리웨이로 갈아타고 가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루트였습니다. 하지만 글렌데일에 살고있던 저는 산길인 엔젤레스 포레스트

하이웨이- 엔젤레스 크레스트 하이웨이로 가서 저녁이라도 함께하고 가자고 제안을 했고

그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당연히 길을 알고있던 제가 선행을 했고 그가 뒤따라

왔습니다. 54마력의 비틀은 오르막에서는 정말 느리기때문에 최대한 탄력을 줄이지

않고 달리려 했지만 그게 뜻대로 되는게 아니었지요. 엔젤레스 크레스트 하이웨이

내리막으로 접어들고 나서는 코스가 친숙한데다 가벼운 차중을 이용해 꽤 빠르게 달릴수

있었습니다.

 

그친구도 뒤따라오면서도 '비틀로도 저렇게 달리는 녀석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지요.
 
약간 눕혀놓았던 등받이 각도를 다시 세우고 자신도 열심히 달렸다고 합니다. 물론 그에게는
 
초행길이었고 제게는 홈링이었으니까요. 첨엔 제차 브레이크가 나가서 폭주하는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같은 코스를 다시 함께 달릴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400마력짜리 재규어 S-타입 R을

타고있었고 그는 순정상태의 볼보 V70 왜건을 몰았지요. 오르막에선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재규어가 빨랐고 내리막에서는 제가 그를 따돌리지 못했습니다.

역시 중급자와 고수의 차이는 확연하더군요.

그는 작년부터 아마추어 레이스 투어링카 J-Stock Class에 뛰기 시작했는데 지난해 말

버튼윌로우 스피드웨이에서 컨피규레이션 1 트랙 레코드를 수립했습니다.

그날 타이어가 다 닳지 않았다면 저도 그친구와 계속 엇갈려서 트랙에 나가느라 만날수 있는

기회가 없었겠지요. 주변에 이런 대단한 친구를 두고 있는것도 참 좋은 일입니다.

그림이 안보이시면 아래 주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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