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지난 5월 11일 토요일, 현대모터스튜디오 고양에서 헤리티지라이브 다섯번째 행사를 가졌었습니다. 이번 주제는 현대자동차의 중형세단 헤리티지였습니다. 코티나부터 스텔라를 거쳐 쏘나타로 이어지는 이야기였는데요, 저희 아버지도 스텔라, 그리고 Y2 쏘나타를 타셨던 적이 있었기에 행사를 준비하면서 예전 생각이 많이 나기도 했습니다.

 

img.jpgimg.jpgimg.jpg

패널을 선정할때도 고민이 많았었는데 아마추어 카레이서이자 화가로 활동하고 계신 이익렬님과 자동차매체의 기자를 거쳐 컨텐츠 프로바이더로 일하고 있는 이재욱님을 패널로 모셨습니다.
두 분이 부자지간이고 자동차 커뮤니티에서 활발하게 활동학 계신데다 EF 쏘나타를 아직도 가지고 계신 것 등으로 인해 이번 주제에 어울릴 것 같아서 패널로 모시게 되었죠.
그리고 헤리티지라이브라는 것이 지나간 이야기만 하는 히스토리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어서 현대자동차에서 중형 PM을 맡고 계신 윤건식님도 패널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PM은 프로젝트 매니저를 뜻하는 것으로 차의 개발을 총괄하는 위치라고 보시면 됩니다. 개발계획을 수립하고 그 계획을 수시로 점검하며 진행상황을 살피고, 이 부문과 저 부문의 입장이 상충될 때 이를 조율하는 일 등을 포함해 다양한 과정을 모두 관리하는 위치라고 보시면 됩니다. MC는 레이서 권봄이 선수가 맡았습니다. 권봄이 선수는 목소리도 좋고 진행능력도 뛰어난데다 센스도 있어서 약간의 돌발상황이 있었던 이벤트를 잘 이끌고 마무리해주셨습니다.
 

img.jpg

행사에서 다루었던 사진과 이야기를 여기에서도 조금 풀어놓을까 해요. 행사에서 미처 하지 못했던 이야기도 조금 있구요.

현대자동차는 첫 시작을 중형승용차로 끊은 메이커입니다. 당시 우리나라 최대의 자동차회사였던 신진은 도요타 코로나를 주력으로 고급차인 크라운과 경차인 퍼블리카, 랜드크루저 픽업 등을 조립생산하고 있었고 기아산업은 아직 삼륜차를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진이나 영상을 보면 도로를 달리는 차의 대부분이 신진 코로나이거나 관용 지프였죠.
코티나는 영국 포드의 모델이었는데 상당히 인기있는 모델이었고 현대자동차가 도입한 차는 2세대 모델인 코티나 Mk2 였습니다.
 

img.jpgimg.jpgimg.jpg현대 코티나는 1.6리터 엔진을 탑재한 중형차로 1.5리터급인 코로나보다 차체도 크고 힘이 좋아서 초기 반응은 좋았습니다.
컬럼시프트의 벤치시트 구성으로 앞좌석에도 3명이 탈 수 있어서 6인승으로 쓰였죠. 영업용으로는 5인승으로 승인이 났었다고 합니다. 코티나는 당시 도로포장률이 높지 않았던 대한민국의 도로에서 영업용으로 험하게 굴리는 경우가 많다보니 고장이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는 자동차가 워낙 고가이다보니 자가용을 구입할 수 있는 계층은 대단히 한정적이었고 관용과 영업용의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었는데 코티나는 자가용 시장에서는 선방을 했어도 영업용 시장에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죠. 그 후속 모델로 들여온 차는 뉴 코티나였습니다.

 

img.jpgimg.jpg

 

이 차는 영국 현지기준으로는 코티나 Mk3였는데 Mk2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델이었습니다.      
엔진은 OHV에서 SOHC로 서스펜션은 Mk2의 맥퍼슨스트럿/리프스프링 구성에서 더블위시본/4링크 코일스프링으로 바뀌었습니다.          포드 코티나 Mk3는 영국 시장에서 선대와 마찬가지로 베스트셀러였습니다.        
당시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에도 종종 등장하기도 했죠.
 

킬러엘리트에서 제이슨 스타뎀의 차로 나오기도 했고
 

라이프 온 마스에서도 주인공차로 등장했습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과는 다른 우리나라의 도로사정으로 인해 품질문제를 겪었던 코티나 Mk2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현대자동차는 뉴 코티나 생산 전에 3대의 샘플차량을 들여와 비포장도로에서 영업용차들이 달리는 것과 같은 가혹조건으로 주행테스트를 실시하여 유럽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한국에서는 발생하는 문제들을 미리 발견하고 이를 보강하여 생산에 반영했습니다.  
 

img.jpg 비포장도로를 주파중인 뉴 코티나

이러한 과정을 거친 뉴 코티나는 국내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을 했죠. 뉴 코티나가 좋은 차이기도 했지만 라이벌이던 신진자동차의 기술제휴선이었던 도요타가 중국시장을 진출하기 위해 한국에서 갑작스럽게 철수하면서 생긴 시장판도의 변화도 한 몫을 했습니다. 독자개발 기술력이 전무하던 상태에서 하루아침에 기술제휴선을 잃은 신진자동차는 GM과 50:50으로 GM코리아를 설립했고 일부 지분은 신진지프로 분리되어 훗날 거화지프를 거치고 우여곡절을 지나 현재의 쌍용자동차가 되었죠.   GM코리아의 첫 차는 시보레 1700이었습니다.

img.jpgimg.jpg 당시 시보레 1700의 신문광고

그때는 진짜 쉐보레가 아니라 시보레라고 불렀었죠. 시보레 1700은 호주의 홀덴 토라나를 들여온 차였습니다. 당시에는 미제에 대한 환상도 컸고 시보레는 미국차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초기 반응은 좋았으나 연료소모가 많고 국내 도로사정에 잘 맞지 않아서 신차효과가 사그라든 이후에는 판매가 신통치 않았습니다.

img.jpgimg.jpg

GM코리아의 레코드는 고급승용차로 당시 장관급 이상의 고위층이 애용하는 차로 자리잡았습니다만 시보레 1700의 부진으로 신진 시절에 비해 시장장악력은 현저히 떨어졌습니다. 시보레 1700에 비하면 뉴 코티나는 연료소모도 적고 내구성이 우수했기 때문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유려한 곡선이 적용된 패스트백 스타일링은 당시 다른 차들보다 멋져 보였죠.
 

img.jpg

이런 뉴 코티나의 인기를 위협한 차는 74년 등장한 기아 브리사였습니다. 7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조금씩 자동차 보급이 늘어나고 부유층만 구입할 수 있던 자가용이 대중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소형차나 중형차나 할 것 없이 모두 비쌌고 소형차에 해당하던 코로나가 생산중단 된 이후에는 피아트 124를 제외하면 모두 중형급인 뉴 코티나, 시보레 1700, 레코드였으며 자가용보다는 영업용과 관용으로의 수요가 많았죠. 브리사의 등장은 중형차 중심의 시장을 소형차로 바꾸는 단초가 되었고 곧 이어 등장한 포니가 이 추세를 확고하게 다지게 되었습니다. 포니는 그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잘 만들어진 차였고 곧바로 베스트셀러에 등극하며 국산자동차의 기준을 한단계 올려놓은 장본인이기도 했습니다. 포니 등장 이후 뉴 코티나는 코티나 마크4에게 자리를 물려주었습니다. 코티나 마크4는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마크4라고 불리기도 했죠.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에도 코티나 마크4가 등장합니다. 이때부터는 독일 포드에서도 토너스(토러스 아닙니다) 라는 이름으로 생산되었죠.

img.jpg

현대자동차는 마크4에 기존의 1.6리터 엔진뿐만 아니라 포니에 쓰인 1.4리터 미쓰비시 새턴 엔진을 얹은 코티나 마크4 이코노미를 출시했습니다. 당시는 분기별 자동차세가 지금과는 많이 달랐는데 1000cc미만, 1000cc이상 1500cc 미만, 1500cc이상 2000cc 미만, 2000cc 이상 등으로 크게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배기량 1001cc인 차와 1499cc 인 차의 분기별 세금이 똑같다는 것이었죠.

img.jpg

배기량 1.6리터의 코티나 마크4는 1.9리터의 레코드 로얄과 3달만에 내는 세금이 똑같았습니다.   마크4 이코노미는 분기별 세금에 있어서 소형차와 동일한 액수였죠. 이런 비슷한 개념의 차는 사실 GM코리아가 먼저 시도했습니다. 잘 팔리지 않는 시보레 1700의 엔진 보어를 줄여 배기량을 1500cc급으로 낮춘 카미나를 1976년 선보였죠.

img.jpgimg.jpg

카미나는 힘도 부족하고 연비도 그리 나아진 것이 없어서 정말 단명하고 말았습니다. 카미나와 마크4 이코노미는 시장에서 다소 다르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카미나는 시보레 1700의 차체를 그대로 쓰기는 했으나 앞뒤 디자인을 크게 바꾸고 이름도 새로 부여하여 새로운 소형차로 받아들여졌지만 마크4 이코노미는 E 배지를 제외하면 1.6리터 버전과 다른 것이 없어서 저렴한 유지비용으로 중형차를 누릴 수 있는 모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물론 코티나 마크4 이코노미도 힘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럽에는 코티나 마크4에 1.3리터 버전도 있었거든요. 1.4리터급 엔진을 얹은 마크4 이코노미가 1.6리터 엔진을 얹은 오리지널 버전에 비해 힘이 달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사실 그건 당시 우리나라 운전자들의 성향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수동변속기 장착비율이 지금과는 달리 99% 이상이었고 운전면허는 당연히 수동변속기차로 따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아트 132같은 차들을 제외하면 타코미터가 달려있지 않았습니다. 저렴한 버전은 타코미터 자리가 비어있었고 상위 트림은 그 자리에 타코미터가 아닌 시계가 붙어있었죠. 운전학원에서도 대략 1단으로 출발해서 시속 20km쯤 되면 2단으로 변속하고 30~40쯤 되면 3단 변속 등으로 가르쳤고 절대다수의 운전자들이 엔진음이 커지기 전에 변속을 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었죠. 아마 폐차될때까지 4천 rpm을 넘겨보지도 못한 차들이 대다수였을겁니다. 배기량도 낮은 차를 운전마저 저회전 영역에서만 운용하니 당연히 힘 부족이 더 크게 느껴졌을테구요.

그렇다고 해도 소형차의 세금으로 누릴 수 있는 중형차라는 점에서는 이코노미 버전의 장점이 컸죠.  코티나 마크5에도 이코노미 버전이 있었습니다.

img.jpg

코티나 시리즈는 당시 포니에 비해 브레이크가 밀린다는 지적도 많았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포니는 그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잘 만들어진 차였고 국산자동차의 기준을 한단계 올려놓은 만큼 코티나의 단점도 더 크게 부각이 되었죠. 그렇다고 포드가 현대의 요청에 따라 코티나 시리즈의 설계변경을 통해 성능을 높여줄 리도 만무했습니다. 결국 독자개발 중형차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죠. 포니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미쓰비시의 견제를 심하게 받은 것 때문에 당시 중형차 개발도 미쓰비시와 제휴하자는 의견은 그 누구도 입밖에 낼 수 없을 정도의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샘플로 미쓰비시 갤랑을 들여와서 참고는 하되 독자적인 차를 개발하게 된 거였죠. 코티나 마크5의 섀시를 바탕으로 보강하고 다듬은 플랫폼 위에 주지아로의 디자인을 적용한 스텔라는 이런 과정을 통해 개발이 되었습니다. 포니를 개발하던 당시에는 우리도 고유모델을 갖게되었다는 의미가 컸다면 스텔라를 통해서는 차량개발 프로세스를 정립하고 미쓰비시를 통하지 않은 독자적인 부품구매 루트를 개척하게 된 것이 큰 의미를 갖습니다.

img.jpg 스텔라 신문광고img.jpgimg.jpg

 

스텔라는 뛰어난 디자인으로 데뷔하자마자 큰 신차효과를 누렸습니다. 코티나 마크5보다 3배정도 잘 팔렸고 대우 로얄시리즈와의 출고대수 비율이 7:3에 이이렀다고 하죠. 시판개시 90일만에 계약대수 1만대를 넘는 인기를 누렸습니다. 신형 쏘나타가 시판개시 5일만에 1만대 계약고를 올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당시는 전국 자동차 등록대수가 100만대가 채 되지 않던 시절이었으므로 석달만에 1만대는 어머어마한 숫자였습니다. 처음에는 1.4리터와 1.6리터의 두가지 엔진을 가지고 있었으나 추후 1.5리터로 단일화되고 나중에는 1.8리터 엔진도 선택이 가능해졌죠.

img.jpgimg.jpg

대우자동차는 스텔라에 대항하기 위해 로얄을 단일차종에서 시리즈로 확대시키며 로얄 살롱과 프린스, 그리고 1.5리터 엔진을 얹은 로얄 XQ를 출시했지요.    스텔라는 우리나라의 중형차가 중산층의 차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그런 확장기를 앞당깉 차라고 보실 수 있을겁니다. 코티나 마크4와 마크5만 해도 운전기사를 둔 임원급의 차로 많이 사용되었을만큼 당시로서는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차였으나 국산화가 많이 이루어진 스텔라는 가격경쟁력도 높았고 사회적 소득수준도 지속적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중형차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img.jpg

스텔라는 85년 캐나다 수출을 시작하면서 좀 더 두툼해진 우레탄 범퍼를 장착한 내수버전을 CXL이라는 트림으로 판매하며 인기를 끌었습니다. 87년에는 서스펜션을 위시본/4링크 방식에서 맥퍼슨스트럿/5링크로 바꾸면서 상품성을 개선했죠. 스텔라는 모델을 세분화하고 옵션패키지도 다양화하여 선택의 폭이 상당히 넓었습니다. 사실 당시 차종 선택의 폭이 작았던 시절이어서 이런 얘기까지도 있었어요. 차를 고를때는 새차냐 중고냐, 소형이냐 중형이냐, 현대냐 대우냐 이것만 고르면 나머지는 옵션과 컬러 선택이라고 할 정도였죠. 스텔라는 그런 현상에 변화를 주면서 차종세분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모델이라고 보실 수 있습니다. 올림픽을 앞두고 택시의 고급화도 진행되면서 그 전에는 소형차 중심이던 택시도 중형화되면서 스텔라 택시도 인기를 끌게 되었죠. 저도 당시 스텔라를 타보고 싶어서 일부러 택시를 탄 적도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저희 아버지도 연금색 스텔라 88을 구입하셨어요. 저희 집으로써는 프레스토 아멕스에 이은 두번째 차이기도 했었죠. 그런데 이 차와 찍은 사진은 없더라구요. 사실 저희 아버지는 그리 활동적인 분이 아니셔서 주말에는 주로 집에서 휴식을 취하셨고 저는 주말이면 나가 돌아다니는 편이었고 또 차를 쓰게 된다면 어머니차였던 프레스토를 타고 다녔었으니까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카메라가 내장된 휴대폰이라는 것은 공상과학소설이나 영화속에나 등장하는 상상의 산물이었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카메라를 들고 나가지도 않았으니 일상사진이 그리 많지 않기도 했었죠. 아버지가 스텔라 다음으로 구입하셨던 차는 Y2 쏘나타였습니다. 미쓰비시와 공동개발한 그랜저의 플랫폼을 바탕으로 개발한 Y-2 쏘나타는 처음부터 미국 수출을 염두에 두었어요. 당시 넘사벽으로 여겨졌던 도요타 캠리, 혼다 어코드와 경쟁할 수 있는 수출전략형 중형차로 개발되었죠. 영하 40도의 캐나다 혹한 테스트부터 영상 42도의 미국 고온 테스트, 해발 1만 피트 고지 테스트 등 세계 각지의 다양한 지형에서 혹독한 시험을 거치며 개발된 쏘나타는 1988년 6월에 데뷔했습니다.

img.jpg

88서울 올림픽으로 인한 밝은 사회분위기와 소득 수준의 향상으로 인해 자동차 시장의 무게중심이 소형에서 중형차급으로 옮겨가던 시기에 콩코드, 쏘나타, 그리고 다양해진 로얄 시리즈가 중형차 시장에서 각축을 벌였죠.

img.jpgimg.jpgimg.jpg

Y-2쏘나타는 다이나믹 세단으로 스포티한 주행성능을 가진 기아 콩코드, 후륜구동과 전통을 강조하는 로얄 시리즈와 각축을 벌였는데요, 시장에서는 Y2쏘나타가 국내 중형차 시장의 선두주자로 등극했습니다. 코티나 시절에는 중형차가 관용이거나 비즈니스용이었다면 스텔라부터는 패밀리세단으로 이동하기 시작해서 Y2 쏘나타가 나왔을때는 중형차가 패밀리카로서의 역할비중이 커졌죠. 그 전의 중형차들이 맡던 다소 공적인 지위는 그랜저와 로얄 수퍼 살롱이 가져갔구요. 사회상이 변하면서 중형차가 사장급이나 탈 수 있던 차에서 중산층의 패밀리카로 바뀌었고 그 사이에서 스텔라와 쏘나타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을거에요.

img.jpg

Y2 쏘나타는 대한민국 최초로 해외공장에서 생산된 국산모델이기도 합니다. 캐나다 브로몽 공장에서 북미시장용으로 생산되었죠.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국내보다 큰 출력이 요구되었으므로 2.4리터 4기통 엔진과 3.0리터 V6 엔진이 탑재되었습니다. 1990년 7월에는 내수용에도 2.4리터 엔진이 옵션으로 적용되었죠.

img.jpg

이번에 패널로 참석하신 윤건식 PM님의 친형께서는 캐나다 브로몽 공장 건설을 위한 인재채용때 현대자동차에 입사하셨다고도 하더군요. 헤리티지라이브에 오신 분들도 모두 쏘나타에 관련된 사연들이 있을텐데 무대에 오른 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권봄이선수도 부모님이 NF 쏘나타를 타셨었고 이익렬, 이재욱 부자는 EF 쏘나타를 지금도 가지고 있으며 윤건식 PM님은 본인이 쏘나타 PM이고 친형께서 Y2 해외생산 프로젝트에 참여하셨고 저희 집에서도 Y2와 뉴 EF 쏘나타를 탔었으니까요.

Y2 쏘나타가 나오기 전까지 중형차 부문에서 확고한 우위를 점하고 있던 대우자동차는 기존의 로얄시리즈로는 쏘나타에 대응이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고 처음으로 고유모델의 개발에 착수하여 90년에 에스페로를 내놓았습니다.

img.jpg

에스페로는 처음에는 2리터급 중형차로 출시되었으나 로얄프린스와의 간섭도 있고 현대자동차에서 준중형급인 엘란트라를 출시하면서 차급을 조절하여 준중형으로 리포지셔닝되었죠.

다시 쏘나타 이야기로 넘어가자면 Y2 쏘나타는 91년 초 페이스리프트를 거치며 뉴 쏘나타로 발전했습니다.

img.jpg

뉴 쏘나타는 택시로도 출시가 되었는데 일반택시는 거의 없었고 모범택시로 많이 팔렸습니다. 당시만 해도 쏘나타는 대중차보다는 고급스럽게 여겨졌습니다. 93년 등장한 쏘나타 II 부터는 중형차가 대중화되었죠. 쏘나타 II는 국산 중형차로는 최초로 에어백을 장착했으며 ABS, 전자식 서스펜션, 전자식 4단 자동변속기 등 다양한 첨단장비가 적용되었습니다. 디자인도 쏘나타의 이미지를 계승하면서도 낮고 넓은 차체로 스포티한 비례감을 줘서 폭넓은 연령의 고객층에게 호평을 받았죠.

img.jpg

중형차는 중장년층의 차라는 인식을 깨트린 첫 중형차가 바로 쏘나타 II라고 볼 수 있어요. 특히 하얀색 쏘나타 II 골드는 젊은이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오렌지족, 야타족의 대표차종이 흰색 쏘나타 II 골드였죠. 쏘나타 II는 내수시장에서 중형차로서는 최초로 94년, 95년 내수시장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우리나라 자동차 시장의 판도가 중형급으로 넘어가는 추세를 이끌었습니다. 쏘나타가 마치 국민차처럼 여겨지게 된 것이 이 무렵부터였죠. 경쟁차로 대우는 프린스를 계속 개선하며 버텼고 기아는 95년 중반 크레도스를 출시했었어요.

img.jpgimg.jpg

기아 크레도스는 스포티한 성향에 콩코드에서는 약점이었던 공간도 넓어서 꽤 인기를 끌었으나 쏘나타 II의 인기를 누르기에는 역부족이었죠.  쏘나타 II는 너무 잘팔리는 바람에 일찍 페이스리프트 된 아이러니를 겪기도 했어요. 1996년 2월 쏘나타 II의 페이스리프트 버전인 쏘나타 Ⅲ가 출시되었습니다. 비교적 일찍 부분변경 모델이 나온 이유를 꼽자면 쏘나타 II가 50만대 넘게 팔리며 식상해진 면도 있고 전통을 중시하는 고정팬을 가진 대우 프린스와 스포티한 성격을 지닌 기아 크레도스의 추격을 더욱 멀찌감치 따돌리기 위한 측면도 있었죠. 쏘나타 Ⅲ는 디자인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자동변속기에 오일 쿨러가 추가되고 소소한 부분도 개선되었습니다. 쏘나타 시리즈는 1996년 6월 쏘나타3 판매중에 판매누계 100만대를 돌파했어요. 한때 쏘나타 엠블럼의 S자를 가지고 있으면 서울대에 갈 수 있고 Ⅲ자를 가지고 있으면 수능 300점을 넘길 수 있다는 루머가 퍼지며 수험생들이 쏘나타 Ⅲ의 엠블럼에서 S와 III를 떼어가는 일이 많아서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뉴스에 보도되기도 했었습니다. 졸지에 ONATA가 되어버린 쏘나타 Ⅲ가 많아졌고 현대자동차에서는 무상으로 엠블럼을 교체해주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EF, NF, YF, LF, 그리고 이번에 새로 나온 DN8 쏘나타까지의 발전상은 윤건식 PM님이 많이 이야기해주셨습니다.

 

2010년 12월 SBS에서 세계시장에서 위상이 높아지는 한국차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할때 촬영을 도와서 YF 쏘나타로 주행장면을 찍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의 장면 일부입니다. 

 

LF 쏘나타는 베스트랩에서 펼친 중형차 레이스에서 1등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자동차시장의 무게중심이 승용세단보다는 SUV쪽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윤건식 PM님도 DN8 쏘나타를 개발하실 때 그 부분이 가장 큰 고민이었다고 하시더군요. SUV가 세단의 영역을 가져가고 있는 것이 최근의 추세이고 점차 그 경계도 무너져가고 있지만 세단은 세단만의 매력을 잘 살리면서 나름대로의 영역을 가지고 갈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었죠. 세단의 장점은 주행성능과 승차감은 물론이지만 스포티한 디자인도 장점이자 SUV와 차별화 포인트입니다. 특히 중형세단은 가장 보편적인 가족용차라는 타이틀 대신 좀 더 개인적인 개성이 강조되는 퍼스널카로 좀 더 가치를 갖게 되지 않을까 하는 예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쏘나타가 경쟁차 대비 가장 우수했던 부분 중 하나가 공간이었는데요, 지금의 쏘나타는 센슈어스 스포티네스라는 디자인 철학 아래 스마트한 경험과 운전감성을 중시하는 차로 성격이 좀 바뀌었어요. 그러면서도 공간도 포기하지 않았죠. 윤 PM님도 초기 컨셉을 잡을 때 혁신적인 디자인을 위해서 후석 거주공간을 포기하고 디자인 위주로 개발할지 아니면 가족을 위한 페밀리 세단을 유지할지 많은 고민을 하셨다고 합니다. 결국 쏘나타는 신규 플랫폼 도입과 병행해서 스타일은 유지하고 거주공간도 확보하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중형차 페밀리 세단을 지킬 수 있게 되었구요.

생각해보면 자동차는 세월이 가면서 점점 커져서 YF 쏘나타는 길이와 휠베이스 모두 그라나다보다 커졌고 지금의 쏘나타는 각진 초대 에쿠스 스탠다드 바디보다 휠베이스가 10mm  깁니다.  한때 당당한 중형차였던 스텔라는 지금의 엑센트와 비슷한 크기죠.  

img.jpg

차급이 아니라 비슷한 크기의 차로 보았을때 사실 자동차 가격은 많이 내려갔습니다.    스텔라 출시 당시 기본형 가격이 530만원이었는데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1830만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현재 엑센트 기본가격은 1138만원 정도인데 당시의 스텔라보다 재료비도 많이 투입되고 장비도 훨씬 많습니다.  83년 당시 대졸 대기업 초임이  20만원이었는데 2년 반이 넘게 한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스텔라를 살 수 있었던 반면 지금은 그랜저도 대졸 대기업 초봉의 연봉 이내의 가격에서 구입할 수 있죠.      

패널 각자 ‘쏘나타를 한마디로 이야기한다면? ‘ 이라는 질문에 이익렬님은 ’쏘나타는 헤리티지다.’ 라고 이야기하셨고 이재욱님은 드라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헤리티지라는 말씀에는 우리나라 중형차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이익렬님 가족의 스토리를 담고 있기도 해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쏘나타는 드라마다” 라는 이재욱님의 말씀에는 쏘나타를 매개로 이루어진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하고 애틋한 이야기들이 있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저는 “쏘나타는 희노애락” 이러고 답했는데 재욱님의 말씀과 비슷한 배경입니다. 그리고 윤건식 PM님은 “쏘나타는 인생이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회사생활의 대부분을 쏘나타와 함께 보냈고 앞으로도 쏘나타 개발에 참여하고 싶으셔서 쏘나타는 본인의 인생과도 같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서 쏘나타와의 인연이 전혀 없는 분은 아마 거의 없을거라고 생각됩니다. 자기차로는 단 한번도 소유하지 않은 분이라 해도 가족이나 지인의 차로 타본 적이 있을테고 그렇지 않다면 택시로라도 타 보셨을거에요. 이번 행사에서는 사실 윤건식 PM님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 정말 좋았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관객으로 오신 분들도 개발자의 입장에서 전달하는 자동차 이야기를 듣는 것은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거든요. 그리고 개발자의 진정성이 담긴 이야기가 잘 전달된 것 같아서 행사를 준비한 많은 사람들중 한명으로써 보람을 느꼈습니다. 다음번 헤리티지 라이브는 아직 일정이 잡히지 않았습니다만 그 때도 재미있는 이야기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