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왔습니다.

은행나무 아래에 주차해둔 차의 문을 열고 앉기 전에 신발에 은행열매가 묻었는지 확인하는 동작과, 키를 돌려 연료펌프가 돌아가는 소리를 배경으로 바라보는 계기판의 한자릿수 외기온이 더이상 낯설지 않은 계절입니다. 과급 차량을 타시는 회원님들은 내려간 흡기온에 웃음지으며 즐거운 주행을 하실 수 있는 계절이기도 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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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맑은 날, 서재필 기념공원 앞> - 미션 오버홀 하고 첫 주행.

CLK를 가져오고 나서 맞이하는 첫 가을입니다. 저번 9월에 올린 게시글 뒤에도 꾸준히 돈은 들어가고 있고, 꾸준히 상태는 좋아지고 있습니다. 양 CV조인트를 교체하고, 미션을 오버홀하고, 디스크/패드를 포함해 기타 소모품을 마저 갈고요. 같은 차종을 타시는 좋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천장과  필러류 원단을 다시 씌우고, 앞 그릴도 순정 그릴을 선물받아 교체하였습니다. 드디어 본넷 끝자락에는 삼각별이 세워졌습니다. 

그에 비례하게도 차계부 오른편의 총계란의 값은 꾸준히 상승세를 보여 이제 곧 자릿수가 바뀌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는 이런 말을 적어가는것이 새삼스러울 만큼 당연한 것으로 느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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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맑은 날, 영광 해안도로> - 차뽕 클리너 넣은 겸 드라이빙.

물론 올라가는 누적비용만큼, 어쩌면 더, 이 차에 대한 애정 또한 수직상승 하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보아온 주위 분들 중 자동차를, 특히 손이 많이 가는 차를 소유하고 관리하시는 분들은 본인의 감정을 애증이라고 표현하시더군요. '이거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차 타기는 싫고' 라고 하시면서요. 

저는 아직 철이 덜 들어서인지, 아니면 차에 너무 감정이입을 많이 해서일까요. 차를 향한 감정은 애증보다는 애민에 가깝습니다. 애정과 연민이요.

차라리 주변에 진단/정비를 확실히 해 주시는 정비소라도 있었으면 저도 애증을 느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진단이 얼마나 힘든지, 정비가 얼마나 힘든지 와닿지 않을 것이고, 저는 그냥 제 통장을 스쳐 지나가는 돈들만 느낄테니까요. 제 생활권 안에서는 이 차를 잘 아는 정비소는 커녕 오래된 외제차라도 성실하게 보아 주시는 정비소도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힘들게 찾은 정비소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같이 핸드폰 부여잡고 해외 사례들을 찾아가며, 제 차때문에 작업이 밀리는게 죄송스러워 정비사분들 옆에서 복스알 하나라도 서둘러 건내드리다 보면... 차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연민이 생기더라구요. '에구 짠한놈, 하필 나한테 와서 타지에서 고생한다' 라는 마음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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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따뜻한 날, 일산 *L모터스> - 너무 좋아하는 샵에서 너무 좋아하는 오일 주입.

사실 제 태도가 건전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도요. 20대 중반의 제 나이로나, 제 현실적 상황으로나 이 차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사치라는걸 머리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미친 짓이지요. '진짜 좋아하는 차를, 앞으로 큰 돈이 들어갈 것임이 분명함에도 산다'라는 결정은, 인생이 크게 뒤흔들렸을때 보통 사람들이 고를 선택지는 아닐 겁니다. 좋은 오일을 쓰기 위해서는 통장 잔고를 확인해 봐야 하고,  큰 정비를 해야 할 때에는 어머니의 사무소에서 단기 알바(?)를 해 가면서 한 일보다 많은 돈을 받아갑니다. 참 부끄러운 일이지요. 이렇게 저를 드러내는 것을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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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늦은 밤, 용산 지하주차장> - 장애인 주차구역 아닙니다. 혹시나 오해하실까..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제가 제 차를 더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순히 혼자 즐거운 차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는 것을 아니까요. 제가 가진 열정에 더해, 가깝게는 가족들의 이해와 묵인, 멀게는 정비소 사장님들을 비롯해서 이 차로 알게 된 소중한 인연들에게 받는 많은 도움들이 모두 더해져서 나온 결과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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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비 오는 날, 한 카페의 주차장> - C...E? C? 까브리 옆에서. 증손자뻘이네요.

아무튼... 자주색 CLK는 이렇게 타고 있습니다. 사진을 올리고 순서를 정할 때만 해도 차뽕을 넣었더니 어떻다, 엔진오일이 어떻다, 어디를 갈았더니 체감이 어떻게 된다, 등등 사건에 근거한 말들을 적으려 했는데..... 적다 보니 또 감성적인 글만 양껏 늘어놓았습니다. 몇년 뒤에 제가 다시 이 글을 보면 흑역사라고 부끄러워할지도 모르겠네요. 흐흐흐흐.

지루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원님들, 아무쪼록 영혼 넘치는 주행 하실때에는 바닥에 떨어진 낙엽 조심하시구요. 때와 장소가 맞으면 번개 꼭 참석해 보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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