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가장 잘 아는 세대의 차들은 80년대 중반에서 현행까지 생산되고 있는 유러피언입니다.

일본차들도 도요타 구형 86부터 현행 하이브리드나 렉서스 IS F의 8기통 엔진, 혼다의 자연흡기 8500rpm이상 순정으로 돌리던 Type R엔진, S2000, V6엔진들, 닛산 S15실비아의 2리터 터보나 R33 GT-R, 미쓰비시 란에보 6,7,10에 경차 660cc터보 엔진, 마쓰다의 4기통, 6기통 모델들, 인피니티의 6,8기통 엔진 등등 경험해보지 않은 엔진들이 거의 없긴 합니다.

유러피언들의 경우 한두번 타본 것이 아니라 특정 모델을 최소 10회 이상 각기 다른 차들로 테스트를 했던 경험들을 생각하면 언급한 세대의 차들은 당시 생산된 거의 모든 엔진을 경험했다고 보면 될 정도입니다.

시승기로 적은 차들도 많지만 적지 않은 차들이 훨씬 많습니다.
하지만 잠시 스친 차들이라해도 엔진에 대한 느낌이나 주행질감은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을 보면 어제 점심을 누구랑 먹었는지도 헛갈리는데 자동차 만큼은 아주 극단적인 선택적 기억 저장 장치가 아직까지는 잘 작동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10년전에 경험했던 엔진을 오늘 다시 타면 그 느낌이 완전히 다릅니다.
작년에 탔던 차도 올해 다시타면 느낌이 다릅니다.

제가 20년이 넘게 보유하고 있는 MK3 Golf VR6나 19년째 보유하고 있는 E34 M5는 자주 타지 못하긴 해서 그런지 탈 때마다 충격을 받을 정도로 오랜만에 타면 생동감이 요즘 차들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때문에 몇 년전 어떤 글을 적었는지를 무시하고 전혀 다른 형태로 글을 적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마저 듭니다.

그렇게 다르게 느껴지는 요인이 몇가지 있겠는데, 요즘 차들이 너무 비슷비슷해져가는 것도 이유의 하나이겠고, 전동화가 다가오는 시대에 살다보니 이런 차를 운전하는 것 자체가 인생의 이벤트라고 생각하니 운전대를 잡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한 나머지 감성이 충만해진 이유도 있겠습니다.

잘만든 엔진에 대한 욕심은 좋은 차를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이라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창조물중에서 엔진보다 더 잘만든 물건이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누구나 좋은 물건을 추구하듯 전 엔진에 대한 소유욕구가 굉장히 강한 편입니다.

차를 가진다는 것보다 어쩌면 엔진을 소유한다는 생각으로 차를 바라보는 관점이 시간이 흐를 수록 더 뚜렷해집니다.

분명한 것은 과거의 엔진보다 현재의 엔진이 좋아져야하는 것이 맞지만 결과물이 그렇지 않은 경우가 워낙 많고 이전보다 Emission에 대한 대응을 목적으로 작동하는 각종 장치들이 설계한대로 움직여지지 않건, 혹은 설계에 실수가 있었건 많은 문제를 만들다보니 극강의 내구성을 가진 엔진들은 과거의 명기쪽에 우세하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현재 최신의 고옥탄 연료에 정밀한 Engine Management System(EMS)을 고려하면 과급기를 장착하고 리터당 200마력을 우습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맞지만 최신배기가스 규정을 맞추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제어가 개입하고 하드웨어적인 제약으로 엔진의 회전질감이 부드럽기는 하지만 날이 서있고 살아있다는 느낌이 좀 떨어진다고 느낍니다.

잘만든 8기통이 정말 흔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W220 S430과 S500 8기통에 아우디의 A8도 주력이 8기통이었고, E65, E66 7시리즈도 8기통이 주력이었지요.
요즘 8기통은 커녕 6기통도 인색한 시절이 되다보니 차의 급과 어울리지 않는 엔진 사이즈가 주는 언밸런스한 감각이 효율 우선주의와 실용주의적인 관점이 자동차의 정체성을 뛰어넘어버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기함급에 8기통, 미드 사이즈 세단에 6기통, 해치백이나 소형차에 4기통이라는 구시대적 공식이 이제는 참으로 멀고먼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한두세대 이전 차들의 가치는 시간이 갈수록 돋보이게 되고, 과거에 흔한 차였으니 큰 감흥이 없었으나 현재는 너무 귀하다보니 그 만족감이 차별성과 더불어 부각이 되는 것이지요.

자동차의 개념이 점점 이동수단으로 운전자 개입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에 전동화, 자율주행화가 답이라는 주장은 말도 안되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운전의 즐거움과 재미 그리고 차를 몰고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자유에 대한 갈망은 자동차를 이동체 수준의 수단으로 전락시키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요소들입니다.

따라서 운전의 재미와 즐거움에 대한 갈망이 폭발하는 지점은 바로 그나물의 그밥 이외의 초이스가 없음을 깨닫는 시점이 될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브랜드간 주행의 정체성이 모호해지는 것도 전동화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 닥칠 딜레마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것일 것입니다.

지금 탔을 때의 강렬한 느낌이 내년에는 어떨지, 그다음해에는 어떨지 기대가 되고, 그래서 잘만들어진 다기통 엔진을 몰 때의 만족감과 행복감이 유독 더 커지는 요즘입니다.
-testkwon-